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악바르 대제 (문단 편집) ===== 북인도 평정 ===== 후마윤 황제가 막 나라를 되찾은 직후 어이없는 죽음[* 도서관 계단에서 자기 옷자락에 휘말려 발을 헛디딘 뒤 넘어져(...) 뇌진탕으로 사망했다.]을 맞이한 뒤 악바르가 왕위에 올랐을 무렵 악바르의 나이는 겨우 13살 밖에 되지 않았다. 너무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아버지의 친구이자 후견인인 바이람 칸이 재상이 되어 섭정을 맡게 된다. 그렇게 제위에 오른 악바르는 즉위하자마자 시련을 맞는다. 옛 [[수르 왕조]]의 잔당들이 다시 힘을 모아 후마윤이 죽자마자 델리로 쳐들어왔고, 결국 악바르는 델리를 빼앗기고 후방으로 후퇴하기를 강요받았다. 게다가 가문의 본거지인 [[카불]]에도 북부인들의 침략이 일어나면서 카불로부터 도움마저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던터라 악바르의 입지는 바늘 위에 서 있는 형국이었다. 섭정인 바이람 칸이 반격을 위해 무굴 제국의 봉신들에게 총동원령을 선포했지만 이들마저 시큰둥했고, 바이람 칸이 수 차례 봉신들을 으르고 윽박질러서야 겨우 군대를 끌어모을 수 있었다. 군대를 소집한 바이람 칸은 수르 왕조의 여러 세력들 중 가장 거대한 세력을 자랑했던 시칸다르 샤 수르와 정면 격돌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제 일이 바빴던 시칸다르 샤 수르는 악바르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무굴 군대가 접근해오든지 말든지 최대한 싸움을 피했다. 오히려 수르 왕조의 또다른 세력이었던 헤무가 더 큰 위협이었다. 수르 왕조의 재상이자 장군이었던 헤무는 스스로를 힌두의 황제로 선포하고 무굴 제국을 갠지스 평원 전체에서 몰아낼 것을 천명하며 무굴 제국에 정면으로 싸움을 걸어왔던 것이다. 바이람 칸은 직접 군대를 지휘해 1556년 11월 5일 [[파니파트 전투|2차 파니파트 전투]]에서 헤무의 군대를 대파하고 델리와 [[아그라]]를 수복했다. 델리를 수복하면서 안정감을 되찾은 무굴 제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시칸다르 샤 수르까지도 무너뜨렸다. 악바르의 군대는 연이어 [[라호르]], [[물탄]]을 되찾았고 1558년에는 대도시 아즈메르도 집어삼켰다. 델리로 돌아온 악바르는 카불에 있던 일족들 모두를 델리로 옮겨오도록 명령했다. 이제 무굴의 중심지가 [[아프가니스탄]] [[카불]]이 아니라 북인도의 [[델리]]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일환이었다. 이후 1559년부터 무굴 제국은 라지푸타나 지방과 말와 지방으로 확장을 거듭했는데, 악바르가 섭정 바이람 칸과 갈등이 불거지면서 확장 정책은 일시적으로 중단된다. 18세에 이르러 어느새 성년이 된 악바르가 더이상 바이람 칸의 지휘를 받기 싫어하면서 바이람 칸과 충돌했기 때문이다. 악바르는 자신의 유모인 마함 앙가와 주변 신하들의 도움을 받아 1560년 봄에 바이람 칸을 체포해 파직했고, 그를 [[메카]]로 순례를 보내버렸다. 바이람 칸은 메카로의 순례길 도중 반대파들의 꼬드김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지만 결국 [[펀자브]]에서 악바르의 진압군에 패배했다. 악바르는 그의 공로를 참작해 메카로 순례를 계속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지만 바이람 칸은 여행 도중 그를 싫어하던 이가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했다.[* 바이람 칸의 부인은 남편이 죽어 어린 아들과 함께 다시 무굴로 돌아왔고 악바르는 그녀와 결혼했으며 그녀의 아들을 친자식처럼 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